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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중국은 런던 선교회 소속 모리슨 선교사가 자리를 잡고 선교를 펴나가고 있었다. 그의 선교 활동이 구라파에 알리어지자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에 와서 활동하게 됐다 그중 구출라프 선교사가 1832년 7월 중국 위해를 떠나 충청도 안면도에 상륙하고 홍주 읍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하려고 하였지만 홍주성 관리의 거절로 철수를 하였다. 그 후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중국 상해에서 활동을 하였지만 부인이 그만 그곳에서 사망하는 비극을 만나게 된다. 이후 그는 산동성 연태에서 통역하는 일을 하다가 조선 천주교 신자를 만나 스코트랜드성서공회 윌리암슨 총무로부터 한자성경을 받아 이들에게 전하고 이들의 안내로 황해도 앞바다에 널려 있는 여러 섬들을 순회하면서 2개월 반 동안 활동하였다.

이후 스코트랜드성서공회 윌리암슨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기 위해 본국으로 연락하여 중국 요령성 영구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로스, 메킨타이어,헌트 선교사는 한국 선교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지 10년 후인 1876년에 뜻하지 않게 의주 청년 이응찬을 만나게 됐다. 이때 로스 선교사는 그를 어학교사겸 조사로 함께 일을 하게 했다. 그 후 이응찬을 통해서 의주 청년 백홍준,이성하,김진기 등을 선교사에게 소개하고 이들이 1897년 메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역시 로스 선교사를 만나 이들도 세계를 받고 이응찬과 함께 로스 선교사와 협력하면서 요령셩 심양으로 선교지를 이동하고 그곳에서 누가복음,요한복음을 함께 번역하여 1882년 봄에 심

양에서 최초로 출판을 하게 됐다. 이때 쪽복음을 완성하는데 식자공으로 수고했던 김청송은 옛 고구려 고도 즙안을 중심해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1884년 11월 로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최초로 75명이 세례를 받고 즙안에 최초로 한국인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다. 1887년 신약전서를 완역하여 발간하였는데 이 번역본을 흔히들 로스역이라 말하고 있다. 의주 청년들은 고향을 드나들면서 기독교 서적을 반입할 수 없는 때 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 국경을 지키는 수비병을 피해서 한국으로 성서를 반입했다.

이수정은 1882년 임오군란에 명성황후 민 비를 도와 충주로 피난했던 것이 생명의 은인이 되어 그의 협조로 1882년 10월 제2차 신사유람단 비수행원으로 일본 동경을 방문할 수 있었다. 비수행원이었던 이수정은 독 일본 기독교 지도자 짜다센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한자로된 신약전서를 선물로 받고 자신의 숙소에 돌아오게 됐다. 이수정은 쯔다로부터 감동을 받고 신약전서를 읽기 시작하여 결국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됐다. 이후 그는 일본 목사와 일본 주재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1883년 4월로 월정교회(현재는 시바교회)에서 야스가와와 낙스 선교사의 협력으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그 후 이수정은 일본에 있는 일본
주재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마가복음서를 번역하게 됐으며, 다시 낙스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선교사 유치 운동에 나사게 됐다. 그해 7월 11월 2회에 걸쳐서 미국 교회에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이 미국 선교 잡지에 발표되자 이를 읽어 보았던 미국인 실업가 맥윌리암스가 선교비를 약속하여 한국 선교의 문이 열리는 좋은 기회가 됐다.

이러한 소식을 접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중국 상해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알렌을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고 1884년 9월 20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그 후 이수정은 마가복음서를 완력하고 요꼬하마에서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 선교사 협력으로 출간을 하고 미국에서 올 선교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미 북장로교회에서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미 감리교회에서는 아페젤러 선교사를 보냈고 이들이 일본 가로하마에 머물면서 이수정을 만나 한글을 배우고 드디어 한국을 향해 떠나게 됐다. 이들의 양손에는 마가복음서가 들려있었으며 그렇게 바라던 한국의 선교사 파송이 이루어지자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언더우드는 곧바로 서울로 입성을 하였지만 아펜젤러 부부는 국내 사정이 불안함으로 인천에 머물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해 5월에는 미국 감리교회의 스크렌톤 선교사 가족이 입국을 하였으며 이 무렵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 부부도 함께 입국 하였다. 잠시 일본에 머물렀던 아펜젤러도 부인과 함께 입국을 하였다. 이때 알렌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사건으로 실력자 민영익이 개화파에 의해 상처를 입자 이를 치료하는 담당의사가 됐다. 알렌은 정성을 다해 치료에 임하여 결국 상처가 치료되어 1885년 5월 고종황제로부터 하사금은 물론 광혜원이란 병원 건물까지 받게 됐다.
이 후 1885년 아펜젤러는 정동에 배재학당(배재고등학교)을 설립하였으며 1886년 언더우드도 정동에 예수교학당(셩신고등학교) 스크렌톤 대부인은 이화학당(이화여자고등학교) 1887년 엘러스는 정동여학당(정신여자고등학교)을 차례로 설립하였다. 다시 1887년 9월에 언더우드는 정동로교회(새문안교회), 아펜젤러는 정동 감리교회(정동제일감리교회)를 최초로 설립하면서 한국에 교회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게 됐다.